(우리 아이를 위한) 김구 백범일지
촛불은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다!
자라나는 우리 자녀에게 물려줘야하는 올바른 나라!
우리 아이를 위한
독립운동가 <김구> 선생의 백범일지!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 치 않는다.
김구[金九](1876 1949) 독립운동가·정치가.
유명(幼名)은 창수(昌洙). 호는 백범(白凡), 초호는 연하(蓮下), 황해도 해주 백운방(白雲坊) 출생. 김순영(金淳永)의 아들. 가정이 극빈하여 자습하고, 12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 14세 때 해주에서 시행된 임진 경과(慶科)에 응시했으나 실패, 17세 때에 소년 훈장(訓長)이 되고, 1893년(18세) 동학당에 가입, 동학란에 참가했다.
실패 후 신천(信川) 청계동(淸溪洞) 안진사(安進士:안중근 의사의 아버지)를 알게 되어 그곳에 이주, 여기서 고능선(高能善)으로부터 많은 교도를 받고 전라도 남원에서 안진사가 대영웅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김형진(金亨鎭)과 함께 중국 유람을 위해 출발, 만주에서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대에 입대한 후, 강계(江界)의 왜인(倭人) 토벌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청계동에 귀환했다.
1896년 2월 안악(安岳) 치하포(?河浦) 나루터 이화보집에서 일본군 육군 중위 쓰지다(土田讓亮)를 미우라 고로로 오인하여 살해, 체포되어 인천 감리영(監理營)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8월 26일 사형 직전에 왕의 특명으로 죽음을 면했다.1898년 3월 탈옥, 삼남 각지를 방랑 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한때 승려가 되고 법명(法名)을 원종(圓宗)이라 했다.
이듬해 고향에 귀환,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종사했으나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 저격 혐의로 검거되어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1910년 국권침탈 직후, 남만주 무관 학교 설립 기금을 모금하다가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 17년 징역 언도를 받았다. 1915년 출옥, 3·1운동 후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1919) 임시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1923), 국무령(1927)을 역임했다.
1932년에 이봉창·윤봉길 두 의사 사건을 지휘하고, 국민 정부 주석 장개석의 요청에 의해 난징에서 면회, 뤄양(洛陽)에서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 시안(西安)에 한국 광복군을 설치하고 미국 교관을 청하여 광복군 장병들을 훈련하는 동시에, 입국 항전(入國抗戰)을 계획했다.광복 후 귀국, 한국 독립당 창설과 함께 당수가 되고 민주의원 총리, 민족 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47년 과도 정부에 반대하고 남북 협상에 참가, 뒤에 서울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살되었다.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김구[金九](1876 1949) 독립운동가·정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