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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開拓者); 이광수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개척자(開拓者); 이광수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미리보기>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개척자(開拓者); 이광수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미리보기>
화학자 김 성재(金性哉)는 피곤한 듯이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리 넓지 아니한 실험실 내를 왔다갔다한다. 서향 유리창 으로 들이쏘는 시월 석양빛이 낡은 양장관에 강하게 반사되 어, 좀 피척하고 상기한 성재의 얼굴을 비춘다. 성재는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 네 걸은쯤 남으로 가다가는 다시 북으로 돌아서고, 혹은 벽을 연(沿)하여 실내를 일주하기도 하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서며 동벽에 걸린 팔각종을 본다. 이 종 은 성재가 동경서 고등 공업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오는 길 에 실험실에 걸기 위하여 별택으로 사 온 것인데, 하물로 부치기도 미안히 여겨 꼭 차중이나 선중에 손수 가지고 다 니던 것이다. 모양은 팔각 목종에 불과하지만 시간은 꽤 정 확하기 맞는다. 이래 칠 년간 성재의 평생의 동무는 실로 이 시계였었다. 탁자에 마주 앉아 유리 시험관에 기기괴괴 한 여러 가지 약품을 넣어 흔들고 짓고 끓이고 하다가 일이 끝나거나 피곤하여 휴식하려 할 때에는 반드시 의자를 핑 들려 이 팔각종의 시계 분침 였다. 실험실 내 고단(孤單)한 생활에 서로 마주보고 있었으니 정이 들 것도 무리는 아니 다. 칠년 북은 목 종은 벌써 칠(漆)이 군데군데 떨어지고 면 의 백색 판에도 거뭇거뭇한 점이 박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소리인지 금년 철 잡아서는 두어 번 선 적이 잇었다. 성재 는 시계가 선 것을 보고는 가슴이 두근두근하도록 놀라고, 그의 누이되는 성순(性淳)도 그 형으로 더불어 걱정하였다.

그러다가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면 형매(兄妹)는 기쁜 듯이 서로 보고 웃었다.

고요한 방에서 성재가 혼자 시험관을 물끄러미 주시하고 앉았을 때에는 그의 측면에 걸린 팔각종의 똑딱똑딱 돌아가 는 소리만이 실내를 점령하는 듯하였다. 그러다, 그러다가는 으레히 성재가 일어서서 지금 모양으로 실내를 왔다갔다한 다. 성재는 흔히 시계 소리에 맞춰서 발을 옮겨 놓았고 성 재가 걸음을 좀 빨리 걸으면 시계도 빨리 가고, 성재가 걸 음을 더디 설으면 덛이 가는 듯도 하였다.


* 작가 : 이광수
李光洙 (1892- ? ) 호는 춘원(春園). 평북 정주 출생. 최남선과 함께 한국 신문학의 개척자이며 소설가.

일본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수업한 뒤 민족사상을 고취하는 계몽적인 이상주의 소설을 많이 썼다. 1919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독립신문>의 주필, 귀국 후 <조선일보> 부사장 등을 역임했다.

1917년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고, 최초의 단편 <소년의 비애> <어린 벗에게>를 비롯하여 <개척자> <흙> <유정> <무명> 등 많은 소설과 논문·수필·기행문·서간문 등을 발표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친일파로 변절했고, 6·25전쟁 때 납북되었으며, 그가 걸어온 길은 바로 한국 현대문학이 걸어온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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