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병수첩 ; 김동인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소설> 미리보기
이 손이 사람을 죽였다.
이 주판이나 놓고 편지나 쓰고 하던 맵시나고 아름다운 손이 사람을 죽였다!
전쟁 마당에서 한 병정이 적병 몇 백쯤을 죽였다니기로서니 무엇이 신기하고 무엇이 이상하랴만 이 맵시나는 손으로 잡은 총검이 적인 호주 출신의 영국군의 가슴에 쿡 틀어박혀서 그를 즉사하게 한 것이다.
무슨 은원이 있을 까닭도 없고 무슨 이해관계가 있을 까닭도 없는 생면부지의 사람 단지 나는…… 일본군의 한 사람이고, 저는 영국군의 한 사람이라는 인연으로 오늘 내 칼 아래 가련한 죽음을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내 칼이 만약 10분의 1초만 늦었더라면 그의 칼이 내 가슴에 박혀서 내가 도리어 가련한 죽음을 할 것이 아니었던가.
전쟁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그를 왜 죽였나. 그는 왜 나를 죽이려했는가.
이런 소리는 너무도 평범하다. 다만 검티티하고 태산 같은 호주인이 납함(.喊)을 하며 우리를 향해 습격해오고, 우리 역시 돌격 호령 아래 적진을 향하여 쇄도할 때에…… 무아무중으로 달려간 뿐이지 이 전쟁 이겨야 하겠다든가 져서는 안 된다든가 그런 생각은 할 여지가 없었다.
적과 우리와의 간격이 열 간으로 다섯 간으로 한 간으로 줄어들어가는 순간순간 다 만 들리는 것은 폭포 소리 같은 납함뿐이요, 보이는 것은 태산이 내게 부서져 내리는 듯한 적병의 쇄도뿐이었다.
최후의 순간…… 적과 백병전이 벌어지려는 그 순간 내 옆구리에 힘 있게 낀 총검은 적의 가슴을 향하여…….
* 작가 : 김동인
金東仁 (1900-1951) 호는 금동(琴童). 소설가. 평양 출생. 한국 현대문학의 터전을 마련한 신문학의 개척자.
문예지 <창조>의 동인으로 이광수의 계몽문학에 반기를 들고 순문학운동을 내세웠다. 진정한 서구적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을 확립했고, 이 땅에 본격적인 단편소설에 대한 기반을 세웠다.
단편집에 <감자> <목숨> <김동인 단편집>이 있으며, <운현궁의 봄> <대수양(大首陽)> <젊은 그들> <견훤> 등의 역사소설이 있으며, 평론에 <춘원연구> <한국근대소설고>가 있다. 단편소설 <감자> <배따라기> <광염 소나타> 등은 우리 현대문학사의 전형적인 작품이며, <붉은 산>은 민족주의적인 작품으로 평가되며, 중편 <김연실전>은 자연주의 경향의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 밖에 <약한 자의 슬픔> <마음이 옅은 자여> <유서> <명문> <광화사> <발가락이 닮았다> <K박사의 연구> <대동강> <태형>등의 단편 및 중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