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조선(兒時朝鮮); 최남선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작품>
〈稽古箚存[계고차존]〉을 쓴 지도 이미 一○[일영]數年[수년]입니다. 생 각하면 그동안 多少[다소]의 進境[진경]이 있을 듯하기에, 다시 古代史[고 대사]의 重霧[중무]를 약간 헤쳐보려 하였더니, 적어보매 依然[의연]히 曠 野迷徨[광야미황]의 感[감]을 禁[금]치 못하겠음이 스스로 딱합니다. 그러나 篇中[편중]에 述[술]한 바 모든 章節[장절]이 다 多年[다년]의 苦 心[고심]과 熟考[숙고]의 存[존]한 바요, 率爾[솔이]하게 放言[방언]한 것 은 하나도 없읍니다. 所言[소언]이 다 正鵠[정곡]을 얻었다 할 수 없음은 毋論[무론]이지마는, 대개 新試[신시]와 創見[창견]에 屬[속]함은 讀者[독 자]의 알아주실 일로 생각합니다.
* 작가 : 최남선
(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대한민국의 문화운동가이다. 본관은 동주(東州)이다.
대한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다가 1907년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귀국했다. 1907년 이광수와 함께 소년지를 창간했으나 한일 합방 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당했고,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아이들 보이》,《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 폐간되었다. 1914년에는 잡지 《청춘》을 발간했으나 1918년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당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 낭독하였다. 3.1 운동을 사주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투옥, 1921년에 석방되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잡지 《동명(東明)》을 발행하였고 1924년 《시대일보 (時代日報)》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자금과 총독부의 압력 등으로 폐간, 1925년 동아일보의 객원과 조선일보 객원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7년 10월 10일 뇌일혈로 별세한 그는 일제 강점기 시대 동안에 이광수, 홍명희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대표되었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