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학 오십 년사 ; 이육사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작품>
중국 문학사상에서 이 50년이란 세월이란 매우 중요한 시기였으니 이 50년동안의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을 종합해보건대
(ㄱ) 이 50년전은 [신보]가 창간되던 해이며(1872) 또한 증국번(曾國藩)이 죽은 것도 바로 이 해였으니, 증국번은 동성파(桐城派)의 고문을 중흥시킨 제일 맹장이었다. 그러나 그의 중흥사업은 비록 광영찬란한 바 있었다해도 가석한 것은, 전연 온고(穩固)한 기초를 갖지 못하였으므로 한가지도 장구한 수명이 없었다는 것은 청조의 운명이 태평천국의 동란으로 말미암아 일절의 병상과 일절의 약점을 노출했을때 증국번 등 일련의 사람들이 태평천국을 타도하여 각지의 비란을 평정하고 그들의 중흥사업을 달성하였다. 그것은 다만 증파의 중흥사업이 오륙십년간의 만청국운을 연장한 것은 될지라도 마침내 만청제국의 부패를 구하지 못하고 만청제실의 멸망을 구하지 못한 것같이 그들의 문학의 중흥사업도 또한 이같은 것이었다.
* 작가 : 이육사
(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한국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활(李活)이며 개명하기 전의 이름은 이원록(李源祿)·이원삼(李源三)이다. 육사(陸史)는 그의 아호로 대구형무소 수감생활 중 수감번호인 264를 후일 아호로 썼다.
1925년 10대 후반에 가족이 대구로 이사한 뒤 형제들과 함께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1927년 10월 18일 일어난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큰형인 원기, 맏동생 원일과 함께 처음 투옥되었다.
1925년 가을부터 2-3학기 동안 베이징의 공립 중국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해 학업하였다. 중화민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에서 난징에 창설해 김원봉이 조선인 항일 군관 훈련반(제6대대) 대장에 있던 군사학교에 1932년 9월 입학하여 보병 육성과 특수 부대원 훈련을 받고 이듬해 4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상하이를 경유하여 국내로 귀국하였는데 1933년 6월 루쉰을 상하이에서 한 차례 만났다는 연구가 나왔다. 이육사는 루쉰 사후 오사 신문학가 루쉰을 애도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으며 루쉰의 1921년작 단편소설 《고향》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1943년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체포되어 베이핑(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다음해인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