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과 제1장 ; 이무영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작품>
수택은 문구멍으로 가만히 내다봤다. 도적이 분명하다. 밖에서는 나오라고 하나 나갈 길을 막아선지라 어쩔 줄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황당해한 도적은 급기야 애원을 하기 시작했다.
"나갈 길을 좀틔워주서유!"
이때 그는 벌써 부엌을 돌아서 울안에 와 있었다. 손에 흉기 하나 들지 않은 좀도적임을 발견한 그는 억 소리와 함께 덮치어 잡아나꾸었다. 그는 학생시대에 배운 유도로 도적을 메어다치고는 제 허리끈으로 두 팔을 꽁꽁 묶었다.
온 집안이 깨고 뒤미처 김영감도 달려들었다. 영감의 손에는 지게작대기가 쥐여 있었다. 도적놈도 그랬고, 온 집안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했다. 몽둥이에 맞을 사람은 그 도적이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지게 작대기에 아랫종아리를 얻어맞은 것은 아들이었다. 수택 자신도 그랬고 도적도 그랬을 게고 집아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것은 영감이 흥분한 나머지 잘못 때린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수택은 얼른 피했었다. 피하고는 안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김노인의 작대기는 재차 아들에게로 향하고 겨누어졌다.
* 작가 : 이무영
(李無影, 1908년 1월 14일 ~ 1960년 4월 21일)
그의 초기작품은 무정부주의적인 반역의 정열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듬해 이효석·정지용 등과 '구인회'의 동인이 되었다. 그 후 시골로 내려가 직접 농사에 종사하며 농촌 냄새가 풍기는 소박한 필치로 농부들의 세계를 유머러스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민>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하였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촌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농민문학 개척의 공으로 조선예술상을 받았고, 1956년 <농부전초>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6·25전쟁 때는 종군 작가로 활약하였고, 자유문인협회 부위원장·문총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세기의 딸> <명일의 포도> <취향> <산가> 등이 있다.
1926년 발표한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이 데뷔작이다. 1929년에는 귀국하여 교사와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31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1933년 순문학을 추구하는 구인회에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3년 친일 소설 〈토룡〉과 〈향가〉를 발표한 바 있고, 《매일신보》에 〈가련한 처칠의 말로〉(1942) 등 친일 논설을 실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