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장 소화(山莊小話); 이무영 (한국 문학 BEST 작가 작품)
<작품>
“집도 시골집으로는 그만하면 쓰겠지만 그 집의 원주인이 참 훌륭한 부인이더구나.”
일년 가야 귀떨어진 동전 한푼 생산이 없이 곶감 꼬치 빼어먹듯 쏙쏙 빼어먹던 그들이 Y씨의 알선으로 시골로 옮아앉기로 결정하자 마침 얌전한 집이서울서도 멀지 않은 G역에 났단 말을 듣고는 그날로 집을 보러 갔던 어머니는 입에 침이 마르게 집과 집주인을 함께 추켜세웠다. 물론 탐탁하게 생각지 않으시려니 하고 은근히 걱정하던 그들은 되레 어머니 태도에 적이 놀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울서도 웬만한 집은 거들떠보시지도 않는 어머니에게 아무리 시골집이 묘하기로서니 어머니 눈에 찰 리가 만무했던 까닭이다.
* 작가 : 이무영
(李無影, 1908년 1월 14일 ~ 1960년 4월 21일)
그의 초기작품은 무정부주의적인 반역의 정열이 주조를 이루었다. 이듬해 이효석·정지용 등과 '구인회'의 동인이 되었다. 그 후 시골로 내려가 직접 농사에 종사하며 농촌 냄새가 풍기는 소박한 필치로 농부들의 세계를 유머러스하고도 사실적으로 묘사한 <농민> <흙의 노예> 등을 발표하였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농촌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일제 강점기 농민문학 개척의 공으로 조선예술상을 받았고, 1956년 <농부전초>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다. 6·25전쟁 때는 종군 작가로 활약하였고, 자유문인협회 부위원장·문총 최고위원을 역임하였다. 1960년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 <세기의 딸> <명일의 포도> <취향> <산가> 등이 있다.
1926년 발표한 장편 《의지할 곳 없는 청춘》이 데뷔작이다. 1929년에는 귀국하여 교사와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1931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1933년 순문학을 추구하는 구인회에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3년 친일 소설 〈토룡〉과 〈향가〉를 발표한 바 있고, 《매일신보》에 〈가련한 처칠의 말로〉(1942) 등 친일 논설을 실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