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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讓寧大君) 시조

양녕대군(讓寧大君) 시조 <시조> 제승축 유별정향구난가 별로향운산 일유고등월화산 일별음용양막후 희증서관기 영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속리산 문영월흉보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
양녕대군(讓寧大君) 시조

<시조>
제승축
유별정향구난가
별로향운산
일유고등월화산
일별음용양막후
희증서관기
영매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속리산 문영월흉보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柳廷顯)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贈) 의정부좌의정 광산군(光山君)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 양녕대군 (讓寧大君)

조선 전기의 왕자, 정치인, 시인, 작가이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첫째 아들이며, 동생 충녕대군의 재능을 알아보고 일부러 미친척 하여 부왕에 의해 폐위되었다. 시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었으며 서예와 그림에도 두루 능하였다. 휘는 제(禔), 자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剛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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